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시 참변 (문단 편집) ==== 상해파 부대의 [[니콜라옙스크 사건|니콜라옙스크 학살]] ==== [[이정식]] 교수는 1961년 UC버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콜로라도대, 다트머스대를 거쳐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에 재직하면서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대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1973년 미국에서 출간해 이듬해 미국 정치학회가 주는 최고 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재단상을 받은 후 세계학계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권위자로 한국에서는 위암 장지연상(1990년)과 경암상(2012), 인촌상(2018년)을 받은 '한국 공산주의사' 1세대 연구의 권위자다.[[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1/08/18/HSTL3PHCH5AJXDIHWDHB6BIJEE/|#]] 이 교수가 집필해 '2008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된 서적에선 자유시 참변에서 무장해제된 '독립군'의 실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주목했다.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독립군은 어느 곳에 있거나 말살되어야 할 존재였지만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을 특별히 증오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1920년 4-5월에 니콜라예브스크에서 일본인들을 학살한 부대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니항사건이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너무나 잔인무도한 것'''...니항이라고 알려진 니콜라예브스크는 흑룡강의 어귀, 즉 흑룡강이 오크츠해(바다)를 만나는 곳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을 점령한 야코부 트리아피친이 이끄는 '''공산 게릴라들은 반동파 숙청이라는 명목하에 약 6천 명의 주민을 참혹하게 학살'''하였는데 그중에는 약 700명의 일본거주민들이 있었고 일본영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23세의 트리아피친은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한국독립을 위해 도울 것이라는 약속뿐만 아니라 그런 뜻의 합의서까지 서명하여 '''수백명의 한국청년들을 동원했었는데 이들은 트리아피친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함으로써 학살의 주역'''이 된 것이었다....[한국인 부대]부대장은 박이라는 교사였는데 그가 한국청년들의 애국심을 선동하여 부대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가 말한 박이라는 교사는 김홍일이 말한 박 일리아일 것이다.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singlebungle1472&no=861468|이정식,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pp 314~316.]] 즉, 자유시 참변에서 공격당한 부대는 수천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니콜라옙스크 사건|니콜라옙스크 학살]]에서 주역을 맡은 한국인 부대이며 이것이 자유시 참변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에서 [[홍범도]]를 모함하는 진영에선 오직 홍범도를 공격하기 위해 [[니콜라옙스크 사건]]의 주역들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